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1세 (문단 편집) === 종교개혁과 사망 === 종교면에서는 외치와 재정만큼 실책을 저질렀다. 그는 스스로를 '교회의 보호자'로 여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, 1533년부터 개신교가 득세하고, 1534년에 '벽서 사건'까지 발생[* 프랑수아의 침실 문까지 개혁 벽보가 붙었다.]하자 개신교 탄압을 심화시켰다. 1535년 7월에 '''<쿠시 칙령>'''을 내려, 당장 복음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추방하겠다고 선포했다. 게다가 그의 개신교 탄압에 반발하는 개신교들을 군대로 무자비하게 탄압했는데 개신교의 위세가 강했던 프랑스 남동부 메린놀 지역에서 수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. 이 때문에 탄압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내 개신교 신자들은 국외로 도주해야 했다. 다만 이와 별개로 카를 5세와 대립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하여 카를 5세를 견제했다. [[장 칼뱅]]은《기독교 강요》<서문>의 헌사를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치는 편지로 서술했다. 1547년, 50세를 조금 넘긴 프랑수아 1세는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. 병상에서 죽어가던 프랑수아는 >"주님, 처음에는 왕관이 저에게 주시는 선물인줄 알았습니다만 지금은 너무도 무겁습니다." 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. 그의 사인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[[매독]]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, 이는 남의 아내를 [[NTR]]하는 바람에 매독에 걸렸다는 소문이 확대된 것이었다. 사후 그의 시신은 장례를 치룬다음 첫째 왕비와 어머니가 묻힌 생드니 대성당에 묻힌다. 그러나 수백년이 지나고 나서 [[프랑스 혁명]]으로 프랑스가 공화국이 될때 그의 무덤은 왕비랑 어머니의 무덤과 함께 혁명 과격파에게 파괴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